희란국연가

  • By 비비
  • 2017년 03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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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소설가 홍명희는 빅토 위고르의 걸작 『레 미제라블』을 『너 참 불쌍타』로 번역했다. 비참한 삶을 연명하는 이들의 이야기니까, 딱 맞는 이름이다. 여기 『레 미제라블』말고도 위 제목이 어울리는 로맨스 소설이 있다.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공주와 자존심 센 영웅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그린 『희란국연가』다.

외면 → 인정 → 오해 → 후회. 이는 후회를 모티브로 하는 로맨스 소설 남자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도식화한 것이다. 외면과 오해 단계에서 가해자로 돌변하는 남주는 여주의 마음에 그 누구보다도 깊은 생채기를 낸다. 이러한 전개는 독자로 하여금 동정심을 자아내고, 계속해서 관찰자로서 참견하고 싶게끔 한다. 불쌍한 여주를 위로하면서 읽다보면, 후회한 남주가 여주를 되찾는 해피엔딩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그런데 『희란국연가』는 독자의 예상과 바람을 기만하듯 빗겨간다.

이미지 = 영화 황후화

달짝지근해야 할 혼례는 요괴들의 습격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아니 애초부터 혼례의 주인공인 자현의 심기가 사납기 그지없었다. 적장의 목을 바친 대가가 귀신 공주 소루라니! 자신은 분명 천하절색 가란 공주를 원했거늘. 그동안 요괴들이 꼬이는 소루를 가까이 한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다. 궁에서도 차마 죽이지 못해 데리고 있는 짐 덩이를 자현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그러나 소루에게 자현은 캄캄한 어둠 속에 내린 한 줄기 빛이다.

너는 꼭 어둠을 밝혀주는... 해님 같아. 보이지도 않는 이 눈에도, 네 빛만은 또렷하다. 그러니까 무엇 하나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해는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냐. 그저 거기에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 그래서 그 빛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나는 그것만으로도 어떤 아픔도 참아낼 수가 있다.

이미지 = 영화 연인

과연 하늘이 내린 영웅이라, 자현이 뿜어내는 양기 때문에 요괴는 그의 곁에 범접할 수 없다. 이를 알아본 소루는 자신을 버리려는 자현에게 대담하게도 거래를 제안한다. 그의 곁에 머무르게만 해준다면, 천하의 영약인 자신의 몸을 이용해도 좋다고. 아아,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로설에서 반짝반짝 빛나야할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추악한지 드러나리란 예고였다.

자신을 능멸한 왕에 분노한 자현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로 마음 먹는다. 허나 콧대 높은 귀족들을 회유해 제 편으로 만들기란 쉽지 않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자현의 참모 비령이 생각해낸 계책은 '사랑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픈 가족을 살려내고 싶은, 그리고 나 자신을 병마로부터 살리고픈 자기애까지. 그러나 비령은 인간의 사랑이 지닌 이기심과 잔인함을 간과했다.

소루의 피 한 방울이면 대상인의 혼절한 여식이 정신을 차리고, 살 한 덩이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귀족은 펄펄 날았다. 기적을 목격한 귀족들은 끊임없이 찾아와, 소루의 몸을 쥐어짰다. 하인들마저 몰래 소루의 살을 뭉텅뭉텅 베어갔다.

감히 종들이 주인을… 주인이라 여기지 않았던 거야… 집 뒷구석 허름한 곳에 처박아 두고는 물과 먹이만 챙겨주면 되는... 그러고는 매일매일 조금씩 피와 살을 도려내어 먹는, 그런 가축으로 여겼던 거다.

소루에게 인간의 사랑은 불가 영역이다. 사랑하는 이와 행복해지고 싶다는 사소한 욕심도 사치이기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라는 세간의 비난에 세뇌된 소루는 속죄하는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간다. 걸어 다니는 만병 통치약이나 욕받이. 인간 세상에서 그녀는 언제나 이타적인 존재여야 했다. 부귀영화와 자현과의 사랑 모두를 쟁취하려는 가란 공주의 욕망은 소루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자현에게 있어 사랑의 장애물은 성벽처럼 높고 견고한 자존심이다. 구국의 영웅 자현이, 소루를 둘러싼 문제들 앞에선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대량 살상을 저지르는 요괴 야토를 막기 위해 소루가 미끼로 쓰일 때나, 귀족과 백성들이 소루를 내놓으라고 다그칠 때도 자현에겐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렇다고 소루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할 수도 없다. 가문과 제 사람들을 지켜야 했기에. 남은 보루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선, 소루에 대한 사랑을 애써 부정하는 것 외엔 없었다.

잔인했던 만큼 잔인함이 되돌아온다. 무정했던 만큼 무정함이 되돌아온다.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다. 제가 놓친 것을...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다.

소루는 자현의 행복을 빌며 그의 곁을 떠났다. 지방귀족에서 왕으로 출세하고, 그토록 원했던 가란공주도 얻은 자현은 껍데기만 남은 채 살고 있다. 몇 년 후 신기루처럼 보인 소루의 모습에 홀린 듯 따라가나, 남은 것은 미칠 듯한 그리움과 후회뿐이다.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독자의 뇌리에 진하게 배어들 것이다.

희란국연가』는 로설의 진리가 해피엔딩이 아닌, 사랑에 대한 해석이란 것을 증명한다. 역경 앞에 쓰러진 사랑. 못난 자신이 부끄러워 끝내 도망치는 주인공. 세상에는 이런 가엾은 미완성 사랑도 존재한다.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는 문체 위에서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한 로맨스는 쉽게 잊을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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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스토리라면 국경도 장르도 따지지 않는 원숭이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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